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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기자에서 역학연구가로, 미즈아가행복작명연구원장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1.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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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461
내용
[사람들] 기자에서 역술인으로, 한가경 미즈아가행복작명연구원장
“어머니 눈물 때문에 포기한 道人의 길 남의 사주만 봐주다 이제야 내 길 찾아”
“중학교 때까지 전교 1~2등을 도맡아 하면서도 도인(道人)을 꿈꾸던 소년이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어머니의 눈물에 마음을 바꿔 속세에 남아있기로 하고 중앙지 기자를 하면서 수많은 특종을 낚아 올렸다. 그러나 소시적부터의 열정은 갈수록 불타올랐고 결국 지난해 회사에 사표를 내고 올해 서울에 작명연구원을 열었다.”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에서 미즈아가행복작명연구원을 운영하고 있는 남광(南光) 한가경(韓佳暻·51) 원장이 이 인생역정의 주인공이다.

그는 요즘 인터넷에서 과감한 오바마 운세론으로 화제를 낳고 있다. “오바마는 2010년 11월 26일부터 5년간 어려움에 처할 것”이라는 게 요지다. “오바마의 운세를 보면 내년 하반기부터는 그에 대한 미국 내 반대세력의 공격이 치열해지면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할 수 있는 운세이다. 유색인종과 백인 간의 갈등이 폭발해 대규모 시위나 암살기도로 이어질 개연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주장이 눈길을 끄는 것은 그가 범상치 않은 경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국민일보 체육부장 출신의 언론인이다. 당시는 한병권(韓炳權)이라는 이름을 쓸 때다. 주로 사회부 법조 기자와 정치부 기자로 있으면서 아가동산 비리 수사, 밤샘수사 위헌 가능성 제기 등 수많은 특종을 터뜨렸다.

예전부터 전업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마추어가 아니다. 정치인과 고위 관료만 100여명의 사주를 봐주는 등 오랫동안 주위 사람들의 사주를 봐주면서 높은 적중률을 보여왔다. 예를 들면 정부 고위 관료인 K씨의 경우 고참이기도 하고 후배들 눈치가 보여서 3년 전에 사표를 내려고 했으나 한 원장이 3년 전부터 “3년 후에 차관이 되니 그만두지 말고 참아라”고 조언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차관으로 입각했다. 한 건설업체 사장은 한 원장의 열렬한 신봉자다. 한 원장이 “머리에 쇠망치 맞을 운”이라고 사주풀이를 해줬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뇌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족집게같이 맞히는 걸 보고 전율을 느꼈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면모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인생역정을 되돌아보자. 그는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중·고교 영어교사로, 일어에도 능통한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해박한 한학실력을 바탕으로 정통명리학 성명학 연구와 임상(실제 적용)에 몰두하셨습니다.” 그의 부친은 명리학에 조예가 대단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제가 어릴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를 걱정하셨어요. 사주가 길에서 흉한 일이 있어서 일생을 마감하는 일생이라고 보셨거든요. 아버지는 박 대통령을 나라를 일으킨 영웅이라고 존경하셨으니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부친의 영향을 받아 그는 어릴 때부터 주위 사람들의 사주를 봐줬다. 밀양에서 소문난 수재였던 그는 명문 경남고에 진학한다. 그러나 고교 때 학업보다는 도인의 길을 가고 싶다는 열망이 부쩍 강해져서 고 2때 주말에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을 뵙고 생각을 말씀드렸다. 부친은 “ 니 길 가고 싶은 대로 가라”고 허락하셨지만 “니가 우리 집안의 기둥인데” 하며 통곡을 하던 모친이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다시 학교를 다니기로 했지만 영적인 세계에 대한 관심은 계속됐고 학교 성적은 내리막길을 걸었다. 이때부터는 동양철학 일변도에서 벗어나 서양철학도 같이 공부했다. 부산 하숙집에서 밤새도록 친구들과 철학 이야기를 하는 게 그의 일과였다.

대학시험을 봤다. 당연히 낙방이었다. 다시 한번 스님이 되겠다고 했으나 이번에도 모친이 그의 발길을 잡았다. 재수를 했으나 시험은 다시 낙방. 그는 당시 후기였던 영남대 법대에 들어갔다. 캠퍼스가 지방에 있어서 도인 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입학하자마자 21일간 장좌불와(長坐不臥·오랫동안 앉아 있되 눕지 않는 불가의 수행방식)를 한 적도 있다. “그때는 아침에 일어나서 눈을 뜨면 오늘 일어날 일을 알게 됐습니다.” 대학시절 그의 별명은 ‘선사(禪師)’였다. 머리 깎고 고무신 신고 캠퍼스 내 호수를 산책하는 그를 두고 동기들이 붙여준 명칭이다.

대학 2학년 때인 1978년에는 경봉스님, 성철스님 등 당대 최고의 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니며 선문답을 하면서 도를 추구했다. 시도 많이 썼다. 그 해 영대문화상에 시가 당선됐고 ‘시문학’지 대학생문예모집에 가작 입선했다.

대학 3학년 때 그는 생각을 바꾼다. “속세에서 내가 만난 부모님, 내가 만난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자.” 그는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면 되지 꼭 스님이 안 돼도 된다”며 “작은 깨달음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시도 안 쓰고 공부도 열심히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진로를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부산대 행정대학원에 진학했다. 1983년 그는 군대를 늦게 갔다. 군에서도 그는 특기를 살려 사주를 봐주면서 재미있게 보냈다고 한다.

1985년 제대 후 법률신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법률신문에 시리즈로 글을 썼다. 집시법, 노동법 등 위헌 소지가 많던 법률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는데 입법론적인 시각으로 접근해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는 1988년 가을에 국민일보 경력기자로 입사하면서 특종기자로 명성을 날렸다.

한평생 역학과 인도철학을 손에서 떼지 않긴 했지만 그가 오늘날 전업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1998년 부친의 타계 등 뜻밖에 몰아닥친 집안의 풍파가 결정적이었다. “저에게 아버지는 단지 아버지일뿐만 아니라 친구이자 정신적 스승이었습니다.” 이어서 남동생이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사주를 다시 들여다봤다. “아버지와 동생이 단명할 사주더군요. 지금까지 남의 사주만 봐주고 살아왔구나 하는 회한이 들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주를 다시 들여다보고나서 삶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내 분수를 알게 됐습니다. 사주의 적중률이 놀라운 것도 알게 됐지요.” 그는 자신의 길에 확신을 갖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2004년부터는 정치부장하라는 편집국장의 제의도 사양하고 역리학 연구에 더욱 몰입했다. 2005년부터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 그해 ‘농민문학’ 가을호에서 시 ‘나를 찾는 일’ 등으로 신인상을 받았다. 고수들도 많이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삼봉 전동환 선생, 남각 김남용 선생, 유당 김희선 선생 등이 그의 조언자들이다.

그는 올 3월 서울 내발산동에 작명연구원을 열었다. 8월에는 홈페이지(www.poethan.com)도 열었다. 그는 최근 유명인사가 됐다. 지난 9월부터 인터넷에 올린 ‘VIP 운세 감상하기’ 시리즈가 세인의 관심을 끈 때문이다. 박근혜, 이명박, 노무현, 이승엽 등 주요 인물에 대한 예리한 분석과 과감한 예언이 들어 있어 통상적인 역술가들의 이현령 비현령(耳懸鈴鼻懸鈴) 스타일 글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름은 사주에 맞는 용신(用神)을 찾아 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용신은 나를 도와주는 행운의 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글이름과 영어이름도 마찬가지로 용신을 찾아 지어야 한다는 것. “용신을 적용하지 못한 이름은 의뢰인에게 오히려 손해를 안겨줄 수 있습니다.” 그는 사주와 이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사주는 몸이고 이름은 옷입니다. 사주는 차량이고 이름은 내비게이션입니다. 이름은 사주를 보완하는 30%의 힘이 있습니다.” 그가 신생아 작명에 주력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는 “역리학 공부에 매진해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본성에 맞는 인생항로를 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 박영철 차장대우 ycpark@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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