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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

제목

한국일보 1월 4일자 사회면 기사.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1.04
첨부파일0
추천수
0
조회수
3082
내용

할머니: 아들이 서른아홉이요, 대학원도 졸업하고 멀쩡한데 취직이 안돼.

A: 올해 인생진로가 바뀌네요. 과감히 모험을 해볼 필요가 있는데 사업을 해보는 게 좋겠소. 닭띠가 동업자면 잘 풀릴 운이네요.

할머니: 장가는 갈 수 있나, 아이는 언제쯤 가져, 이놈이 술도 많이 마셔, 건강은….

A: 올해는 결혼 수가 없어요. 말년에 자식 복이 있으니 걱정 마시고….


대화는 1시간가량 이어졌다. 취직문제로 시작한 70대 할머니의 푸념은 마치 아들의 인생설계를 주문하듯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난감한 건 A, 서울 신촌 한 사주카페의 역술인 공은영(50)씨다.

그는 "사주란 본디 전체적인 흐름을 타야 하는데, 세밀한 사업분야, 구체적인 결혼날짜, 손주 운까지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꼬치꼬치 캐묻는 손님이 갈수록 늘어 진땀이 난다"고 했다.

"얘기 들어주고 덕담까지 해주니 흡족하다"던 할머니는 신년을 이틀 앞둔 지난달 30일 어스름 녘으로 흡족한 발길을 뗐다. 공씨는 "그저 예방차원의 가능성만 얘기해주는데 다들 만족해 한다"라며 다음 손님을 맞았다.

신년맞이 점집 방문은 몸과 마음이 헛헛한 이들의 통과의례. 올해도 어김없다. 뭔가 부족했던 가는 해를 털어버리고 오는 해를 희망으로 맞으려는 기대 한 자락이 깔려있다. 그런데 올해는 '신년운세는?'이라는 짧은 질문에 담아내지 못하는 고민이 많은 듯했다.

팍팍한 불황의 골이 깊어지면서 점집을 찾는 이들의 질문은 더욱 깊고 세밀해졌다. 역술인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더는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아진 탓"이라고 풀이했다.

화두는 여전히 경제였다. 한마디로 돈 잘 벌고 취업이 빨리 됐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김모(52)씨는 지난해 부도를 냈다. 20년간의 직장생활을 접고 2001년 시작한 작은 건설업이었다.

그는 "연 매출이 수십억원에 달했는데 하루아침에 쪽박을 차고 이혼까지 하게 됐다"고 하소연했다. "인생의 바닥, 도통 답이 안 나오니 미래에 대한 힌트라도 얻고 싶다"던 그의 질문은 구체적이고 집요했다.

서울 강남 수서동에서 점집을 하는 역술인 이창우(49)씨가 차근차근 일러주는데도 김씨의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이씨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파생되는 부수적인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니 어지간해선 만족하는 법이 없다"고 했다.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간 역공을 당하기 십상이다. 전망 좋은 부동산이니 쏠쏠한 재테크방법이니, 잘 나간다는 업종 등을 미리 공부해두는 게 역술인의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되고 있을 정도다.

동행의 이유도 달라졌다. 어머니 손에 끌려온 풀 죽은 청년은 십중팔구 취업준비생이다. 역술인 공씨는 "혼사는 뒷전이고 부모와 함께 점을 보러 오는 고학력 백수들이 꽤 늘었는데, 현실상황은 파악하지 못하고 강한 자기애(愛) 때문에 눈만 높아진 이들이 많아 안타깝다"고 했다.

역술인 이씨는 "외도나 성격차이보다 경제적인 문제가 이혼사유가 되는 세상이라 부부가 함께 온 경우도 궁합보다는 사업전망 등을 묻는 게 많다"고 했다.

위기에 빠진 중년들도 점집을 찾는다. 서울 강서구의 역술인 한가경(52)씨는 "40대 이상 중년여성이 7할인데, 대부분 외도나 이혼에 관한 상담을 한다"고 했다.

"남편의 실직이 빌미가 된 불화가 이어져 이혼을 결심한" 주부(40),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한 남편을 떠나 새 인생을 찾겠다"는 영양사(46) 등은 그나마 양반이다. 외도를 당당히 털어놓고 연애상담을 하는 기혼자도 적지 않다는 게 역술인들의 귀띔이다.

개명(改名)도 주요 테마다. "게임만 하는 자녀 둘의 이름을 좀더 학구적으로 지으면 공부를 하지 않을까, 가족 모두 새 출발하고 싶다"는 생각에 점집을 찾은 강모(38ㆍ요식업)씨가 대표적이다.

역술인 공씨는 "이름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지난해에 비해 30~40%가량은 늘어났다"고 했다. 결혼 취업 승진 학업 이성교제 등 이유는 제 각각이지만 개명으로 삶을 바꾸고 싶어하는 마음은 같다.

그러나 모든 걸 운에 맡기는 이들은 줄었다. 정확한 미래예측보다는 친구의 조언을 듣듯 위로와 희망을 얻기 위해서 점집을 찾는다는 것이다. 동대문구 신설동에서 사주카페를 하는 역술인 김희선(61)씨는 "각자 처한 경제적인 고민을 꼬치꼬치 털어놓는 이들에겐 사주를 정확히 풀어서 알려주기보다 힘이 되는 얘기를 해주는 게 결과가 좋다"고 말했다.

역술인 이씨는 "사주를 통해 대안을 제시 받기보다 마음의 위로를 얻으려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기실 각자가 품고 있으되 누군가 곁에서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는 걸 바란다는 얘기다.

미처 점집을 찾지 못한 이들을 위해 올해 경인년(庚寅年)의 전반적인 운을 물었다. 역술인들은 공통적으로 "전화위복(轉禍爲福)의 한 해"라고 점쳤다. "한국전쟁,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경(庚)이 들어간 해에는 다소 불운한 일이 많았지만 이를 잘 극복하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해"라는 것이다. 올 한해 중간에 힘들더라도 견디고 버티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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