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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스승을 기린 동인전 작명...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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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2037
내용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게재 일자 : 2015년 09월 25일(金)
한일미술전과 學日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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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 도록의 표지 이중섭 그림
김형국 / 서울대 명예교수

올 벽두부터 2015년이 퍽 뜻깊은 해라고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우리 광복과 일본 ‘종전(終戰)’ 아니 패전이 희비 교차한 지 칠십 년, 그럼에도 불구대천 두 나라가 관계를 정상화한 지 오십 년을 헤아림을 유념한 말이기도 했다.

원론적으로 ‘압제-종속’의 관계를 선린의 사이로 바꾸었으니 축년(祝年)이 되고도 남았다. 그럼에도 어제오늘의 두 나라 사이엔 차디찬 냉기류가 흐른다. 무엇보다 과거사 청산에 지성을 다하는 독일과는 달리, 원폭 피폭을 빌미로 삼았던지 오히려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기는 시각까지 보태진, 일본의 수정주의 입장을 우리가 도무지 납득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경색에도 일본 쪽은 역사적 기년(紀年)에 값하는 문화 행사를 지난 4월 초부터 펼치고 있다. ‘한·일 근대미술가들의 눈―조선에서 그리다’라는 주제의 미술 전시가 그것. 강점기에 한반도에서 펼쳤던 문화정책의 일단이던 미술진흥책을 보여주는 전시회였다. 초기의 강압 일변도를 완화해서 내선일체(內鮮一體)를 꾀한다며 본토의 제전(帝展)을 흉내 낸 선전(鮮展), 곧 조선미술전시회를 개최했던 저간의 사정 그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주로 서양화를 배웠던 우리 화학도(畵學徒)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기획전이었다.

그즈음 일본 견문 단체여행에 따라갔던 나는 전시회 소식을 듣고 개인적으로 가나가와(神奈川) 현립 근대미술관의 개막식을 찾았다. 전시회는 내년 초까지 연이어 전국 주요 5개 미술관의 순회 전시도 예정된 대규모였다.

일단, 행사에 때맞춰 출간한 도록이 볼 만했다. 내용 충실성 고하를 떠나, 제때 책자도 못 만드는 우리 공공미술과 달랐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일가를 이룬 미술가들의 회고전을 거창하게 기획해 놓고선 도록은 잘해야 전시 중반에나 겨우 배포하기 일쑤인 나태와 비교되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펼쳐지는 강점기의 미술은 역시 “괴로운 과거”의 만남이었다. 해도 우리에게 “없던 것으로 여길 수는 없는 과거”였다. 주최 측이 한민족 교화(敎化)의 내력만 내세우는 전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원려(遠慮)를 일부 반영한 것은 그나마 독립 한국에 대한 배려라 싶었다. 강점기에 벌이를 얻고 싶은 화가들의 출세 창구였던 선전 화가들만으론 한·일 기획전을 짤 수 없겠다는 최소한의 문화 인식은 갖고 있었다. 선전에 내지 않았던, 이를테면 김환기, 유영국, 이중섭 등이 한국 현대미술의 대명사로 우뚝 솟았음을 외면할 수 없었다는 말이었다.

비록 나라 사이는 ‘지배-피지배’의 형세일지언정 예술가는 본디 자유정신의 소유자가 틀림없다는 믿음을 갖고 출품작을 둘러보았다. 전황이 치열해질 즈음 추상화를 본 검열 장교가 “미치광이가 그린 것 같은 동그라미니 삼각형을 갖고 하는 참으로 어리석은 놀음”이라 하자, “미치광이라 하는데, 미치광이는 비통하며 인간으로서 바닥을 친 가슴 아픈 희생자”라고 응수했던 일본 화가 마쓰모토 ?스케(松本竣介, 1912∼1948)는 물론,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나는 갖고 있다”던 우리 박수근 같은 예술 정신의 화신들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였다.

그렇게 둘러보던 도중에 사토 구니오(佐藤九二男, 1897∼1945)의 자화상을 만나자 무척 반가웠다. 서양 청년처럼 생긴 호남이었다. 그를 금방 알아본 것은 우리 현대화단의 별로 빛나는 유영국, 장욱진, 이대원, 권옥연 등이 다녔던 경성제2고보(오늘의 경복고)의 미술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1961년을 시작으로 네 차례나 서울에서 열었던 ‘2·9 동인전’은 제2고보의 ‘2’와 스승 이름 가운데 한 자 ‘9’를 따서 지은 작명이었으니, 그건 스승에게 입었던 감화에 대한 제자들의 헌사(獻詞)였다.

내가 평전을 적었을 정도로 가까웠던 장욱진도 말해주었듯, 제자들은 하나같이 스승을 통해 피카소, 마티스 등의 활동상을 듣고는 “감동을 먹었다” 했다. 그런 그인데 1942년에 기고한 잡지 글은 역시 ‘역시나’였다. 

조선 하대(下待)가 체질이던 그 시절 여느 일본인의 시선 그대로였다. “나는 조선의 청년이 예술적 무능자로,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 자연의 미를 즐길 줄 모르는 국민으로 남는 것을 불쌍히 여겨, 예술 문화의 존귀함을 교실에서 열심히 역설하였다”고 적었다. 망국을 당한 만큼 싸잡아 욕을 먹게도 되었지만, 그렇다고 한민족을 일컬어 “자연의 미를 즐길 줄 모른다” 함은 도대체 무슨 망발인가.

한민족의 열등성 주장에는 흰옷 복식도 꼽혔다. 조선인들이 물감 만들 능력이 없었던 데다, 당파싸움 정치에 시달린 나머지 노상 흰색 상복으로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 “우스꽝스럽다”며 흰옷을 입지 못하게까지도 했다. 조선을 바라본 그들의 미학에 대해 해방 직전 경주에 정착했던 ‘최후의 신라인’ 윤경렬의 반론(‘신라의 아름다움’, 1985)은 준엄했다. “우리가 만일 색깔의 즐거움을 모르는 슬픈 민족이라면 무지개색으로 엮어진 아기들의 색동저고리는 어떻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처녀들이 입는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나 노랑 저고리에 남색 끝동을 달고 진분홍 치마를 입는 찬란한 색깔의 배색은 어떻게 생겼을까?”

정치적 과거사 정리도 현안이지만, 식민시대 이래 오늘까지도 이어지는 문화 왜곡의 시정도 오늘의 우리가 풀어야 할 매듭이다. 말하자면 극일(克日)인데, 한편으로 인류 보편의 시각으로 두 나라 관계를 살폈던 양심 일본인들을 기억하는 학일(學日)도 이 시대의 과제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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